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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기획] 위대한 우리의 독립 투사, 누가 있을까?


[광복절 특집기획] 위대한 우리의 독립 투사, 누가 있을까?

 

8월 15일이 어떤 날인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을 텐데요.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8월 15일! 바로 사흘 뒤, '광복절'을 기리며 우리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다시 한번 알아보고 가슴 깊이 차오르는 말을 전하려 합니다

 

 

8월 15일, 광복절, 대한독립만세


 

안중근 의사 (1879.9.2~1910.3.26)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 민족독립투사
 
국권회복을 위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했던! 용맹한 안중근 의사가 대표적인 독립투사로 손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직접 총살한 사건으로 유명하죠.

 

* 의병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한 상황 중, 국가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모여 외적에 대항하여 싸웠던 구국 민병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공소도 포기하고 의연하게 여순감옥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및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힘을 쏟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합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 中

 

 

▲ 안중근 의사, ⓒ'http://bit.ly/1zNehB7'

 

 

 윤봉길 의사 (1808.6.21~1932.12.19)
25세 꽃다운 나이로 순국,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업적

 

19세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던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의열 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루쉰공원 거사를 계획합니다.

 

* 한인애국단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일본의 주요인물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조직

 

1932년 4월 29일,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담대하고 의연했던 그는 중국 루쉰공원에 모인 일본의 적장들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이 의거로 적장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등의 쾌거를 올리게 되고요.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 바로 구금된 윤봉길 의사는 갖은 고문 끝에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25세의 젊디 젊은 나이로 순국한 것이죠. 윤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中

 

 

윤봉길, 윤봉길 의사

▲ 윤봉길 의사, ⓒ'http://bit.ly/1qLxyxc'&'http://bit.ly/1s4uSiT'

 

 

홍범도 선생 (1868.8.27~1943.10.25)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날으는 홍범도'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기점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홍선생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포수들의 총을 가지고 북청으로 옮기는 일본군을 후치령 고개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했습니다.

 

같은달 25일에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1919년 3.1절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할 무렵,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서게 되죠. 그리고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에서 선생이 이끌던 대한독립군 및 대한 북로독 군부군, 대한신민단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국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게 '날으는 홍범도'선생은 의병과 계몽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찬란한 독립을 위해 한평생 힘썼습니다. 

 

* 대한독립군 1919년 홍범도 선생의 지휘 하에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4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일 독립군 부대 중 가장 강력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의 전과를 올린 바 있다

 

* 대한신민단 1919년 단장 김규연를 필두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신민회, 신민단, 대한신민단 등으로도 불렸으며 40여 지역조직에 2만여 명의 단원을 두었다. 당시 국외에 거점을 두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국내 진공을 준비하고자 조직을 결성했는데 대한신민회도 그 중 하나다.

 

"당당한 독립군으로서 이 한몸을 쏟아지는 총탄 속에 던지여 반만년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민족을 위하는 참뜻이라."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 中

 


홍범도,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

▲ 홍범도 선생, ⓒ'http://bit.ly/1ueNBWW'&'http://bit.ly/UMLehw'

 

 

대한독립, 대한독립만세
▲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http://bit.ly/1xXe3EF'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의 위대한 독립투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값진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용맹했던 독립투사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