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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수다/건강한 물 이야기

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꿈을 이뤄낸 자랑스러운 위인들

 

 

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꿈을 이뤄낸 자랑스러운 위인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9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중략)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방울이가 좋아하는 징기스칸의 명언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렸던 그는 위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인물이죠.
들쥐를 잡아먹으며 살만큼 힘들었던 상황도 그를 위해 준비된 시험처럼 보이는데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상황인 것은 확실합니다. 원대하고 커다란 꿈도 당장

가진 것 하나 없이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니까요. 이러한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우고, 불을 밝힐 돈이 없어 어두운 밤 달빛을 비추며 공부하면서도 꿈을 이룬 위인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방울이와 물로 주린 배를 채웠던 우리의 위인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해요.

 

 

배고픔, 굶주림, 수돗물, 물

[이미지 출처-영화'스탠리의 도시락']

 

 

▮ 노비로 태어나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된 장영실

 

조선시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바뀔 수 없는 제도가 하나 있었죠. 바로 신분제였습니다.

천민으로 태어나 평생을 천하게 살다 죽어야했던 이들 중에는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있었죠.

 

관청의 기생인 관기의 아들로 태어나 관아의 노비로 살아가야 했던 장영실은 자신의 위치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해냅니다. 망가진 무기를 고쳐 오랑캐와의 전투에 크게 기여하는가하면, 큰 가뭄이 든

수차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기도 했어요. 또한 나라 전반의 기상을 예측할 수 있는 측우기와 물시계 등 수많은 관측

기구를 척척 만들어내면서 종6품인 상의원별좌라는 벼슬자리에까지 오릅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수와 맞먹는 지위까지

오른 셈이에요. 당시 세종대왕의 총애도 컸지만 자신의 재능과 성실함으로 일어나기 힘든 기적을 이뤄낸 그,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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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립과학관 장영실 동상]

 


▮ 2차대전 전범국 독일을 화해와 협력의 발원지로, 빌리 브란트

 

세계 2차 대전 이후 차갑게 얼어붙었던 냉전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 통일의 밑거름을 마련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1971년 모두가 인정하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그는 아직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거론되곤 하죠.

 

빌리 브란트는 사생아로 태어나 눈 감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본 적 없었고 종일 일해야 그 날 하루를 먹고 살 수

있었던 가정 형편상 의붓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했어요. 학창시절부터 정치 활동을 할 때까지 그의 가족

관계와 불우한 경제사정으로 손가락질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났습니다.

 

또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존중받으며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실제로 이루어나갔지요. 분단된 독일을 화합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전범국의 총리로서 세계 모든 나라에게 사죄하기 위해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그의 진실한 모습은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고, 독일 및 동유럽국가들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답니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노벨평화상 수상자

[이미지 출처-The guardian]

 

 

▮ 세상에서 가장 검소하고 청렴했던 정치인, 잠롱

 

청렴한 정치인의 대명사이기도 한 태국의 전 방콕시장 잠롱 스리무엉. 그도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

니와 과일을 내다 판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야하는 처지였습니다. 편히 쉴 내 집 한켠이 없어 친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좁은 방에 얹혀살면서도 그는 불평불만 한번 내뱉은 적 없다고 해요. 머리도 좋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지만

대학에 진학할 돈이 없어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중령까지 진급했고,

상원 의원을 지내다가 방콕 시장에까지 당선됩니다.

 

방콕을 대표하는 시장이 되어서도 그는 하루 한 끼 먹는 습관을 고집했고 검푸른 농민복만을 입었으며 월급은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 폐품 창고를 개조한 집에서 살면서 새벽마다 청소원들과 거리를 쓸었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

혼란과 부정부패가 가득했던 태국에서 오로지 시민들의 건강과 일자리, 자유와 평화만을 위해 일했던 그

정치에서 물러난 지금도 끊임없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지요.

 

 

[이미지 출처-Gosee creative news services]

 


사실 이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좌절할만한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내가 처한 이 불우한 상황을 다른 누군가가 경험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곧은 의지와 사명감에 결국 가난도 두손 두발 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