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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수다/건강한 물 이야기

미술가 안창홍의 양평 아틀리에, 인간에 대하여




사람을 듣다


미술가 안창홍의 양평 아틀리에

인간에 대하여





얼굴은 때로 말이다. 예순 하고 한 해를 넘긴 화백의 얼굴은 여섯 살 아이처럼 말갛고 천진했다. 누구보다 도발적 언어로 사회 개혁을 꿈꾸던 화가는 어느새 스스로 변화하는 가장 희망적인 진화를 맞았다. 웬만한 세상사에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평온한 얼굴이 말을 한다. 삶이란 늘 긍정이 승리하는 정직한 투쟁일 뿐이라고.


글 김일아 / 사진 홍상돈




냇가를 건너야 닿는 아틀리에


집 안에 그림을 거는 것이 트렌드라 하고, 갤러리마다 대단한 전시들을 소개하지만 늘 예술이란 강 건너나 바다 너머에 있는 양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설명을 들어도 100% 이해할 수 없는 것, 어려울수록 더 가치 있는 것이 고품격의 예술일지도 모르겠다고 친해지기를 미뤄두던 차에 안창홍 작가의 작품을 마주했다.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채의 진수성찬, 키치적인 감성과 저돌적인 표현 방식을 가졌으나 어딘지 따뜻하고 우아한 그의 그림을 보며 머리보다 먼저 마음 한 켠이 움직인다. 아차, 예술이란 이렇듯 원초적인 감동을 주는 무엇이 아니었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색채를 가진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서양화가 안창홍. 양평 끝자락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은 건 긴 겨울 끝 깃든 봄기운이 반가운 2월의 마지막 주였다.





졸졸 흐르는 냇가, 흑천을 건너야 아틀리에가 있는 마을에 갈 수 있다. 안창홍 작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자욱한 안개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풍경과 마주하고 그 자리에서 살겠노라 결심했다. 냇가가 마을 밖으로 닿는 유일한 수단이라 장마철에는 무릎까지 차는 도랑을 건너야 하거나 며칠씩 나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는 지금의 고립된 위치가 더욱 마음에 든다. 그렇게 작업해오길 20여년. 그가 사람들과 떨어져 외롭고 고독한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다. 사람이 가득한 공간에서는 대상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기에 그는 예술가의 숙명인 외로움을 선택했다. 특히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에게 그는 늘 촉각을 세운다. 평생을 두고 그들을 재조명하고 좀 더 진솔하게 마주하며 대변하고 싶다.






운명처럼 마주한 강가 마을


안창홍 작가가 이곳 양평에 자리 잡은 것은 1989년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때부터 생계를 꾸려나갈 정도로 독립적이었던 그는 규칙적인 생활과 규범을 강요하는 학교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고등학교 때 학업을 중단하고 공사판과 자갈치 시장 등에서 뜨거운 삶의 속내와 마주했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미술 선생님의 설득으로 학교에 돌아가 장학생으로 졸업한 안 작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자갈치 시장에서 원 없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부산에서 입실 화실을 시작했는데 고생 고생하다 입소문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잘되면 될수록 제도권의 미술교육이 싫어 대학을 거부한 스스로에게 갈등이 찾아왔다. 서울로 올라와 화곡동에 개인 작업실을 차렸다가 우연한 기회에 시를 쓰는 후배가 사는 양평을 찾았다. 물 맑고 비밀스러운 이곳에 매료되어 폐가에 짐을 풀고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후배는 양평을 떠나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을 우직하게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 안창홍


1976년 데뷔한 안창홍 작가30여 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3천여 점이 넘는 작품을 선보인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거장 미술가이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메시지를 자신만의 언어로 화폭에 담아온 그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솔직한 메시지로 미술계에서의 호평과 마니아들을 이끌어왔다. <시대의 초상>(2009), <베드카우치>(2008), <49인의 명상>(2004), <화가의 똥>(1999), <봄날은 간다>(1985) 등 비판적 시선과 에두르지 않는 신랄한 표현의 작품은 전 세계 여느 젊은 작가와 견주어도 으뜸에 꼽힐 만큼 여전히 통쾌하고 재치가 넘친다. 특히 1982년 연작으로 발표한 <가족사진> 시리즈는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중국 현대미술의 블루칩 장 샤오강, 쩡판즈의 작품과 흡사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은데 그들보다 훨씬 앞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실제 몇몇 중국 작가들이 제 작품에 영향을 받았고, 중국에 초청되어 베이징에서 쩡판즈 같은 작가들과 소통하며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지요.” 고졸 출신, 비주류라는 편견을 떼어내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대열에 위풍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자연이 인간을 위로한다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경상도 사나이는 늘 물과 친숙했다. 어릴 때 강가 모래밭에서 하루 종일 뛰어놀던 기억, 강가에 핀 참꽃은 따서 씹어 먹으면 입 안 가득 달콤한 맛이 퍼져나갔다. 진달래 참꽃으로 부모님은 술도 담그고 화전도 부쳐 먹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물빛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꽃이 피면 행복하고 포근한 기분이 어린 소년을 따뜻하게 품어주곤 했다. 안창홍 작가는 5년 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폐암 선고를 받고 폐 한쪽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했다. “소풍 가듯 즐겁게 수술을 하고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안창홍 작가. 이제 그는 안다.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평생을 두고 지켜내고자 했던 것의 실체를. 기억은 때로 인생을 지배하고, 그는 영원히 인간과 인간을 치유하는 자연을 사랑하고 싶다. 그만의 시선으로 풀어낸 자연의 이야기는 올겨울 그리스 바다를 담은 풍경전으로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직관과 통찰의 감성으로 이성과 논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진짜 예술가 안창홍. 더 깊어진 거장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봄날은 간다>, <기념사진>, <얼굴> 연작 등 작품에 모티브로 사용되는 50~60년 전 옛날 사진들은 주로 인터넷 경매에 나온 것을 구입하거나 골동 가게에서 개인적으로 구한다. 사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되었다. 증명사진 작업은 70년대 후반부터, 가족사진 역시 그가 계속 집착하는 소재이다. 화가 안창홍에게 얼굴이나 초상, 사진은 사회 전체의 현상보다 그 안에서 상처받고 영향받는 개인의 기억과 심리에 초점을 두는 환기물이다. 



출처 : K-water 뉴스레터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