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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수다/워터카페

영화 암살, 밀정의 핵심인물, 약산 김원봉

 

 

영화 암살, 밀정의 핵심인물, 약산 김원봉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맞아요! 오늘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순국선열의 얼을 기리는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날이 되고자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는데요. 최근 독립운동을 위해 싸웠던 순국선열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또한 큰 인기를 끌며 관심을 받았었죠. 대표적인 영화로는 암살과 밀정이 대표적인데요. 이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 바로 동일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방울이가 흥행한 이 두 영화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하는데요. 자, 영화 암살, 밀정의 핵심인물, 약산 김원봉 선생을 소개합니다~

 

 

▮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 약산 김원봉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영화 밀정에서는 배우 이병헌이 각각 약산 김원봉 선생을 연기하며 그의 정신과 의식을 전했는데요. 약산 김원봉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현상금 최고액이었던 100만원이 걸려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현재 시세로 따지자면 약 32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는데요. 이처럼 현상금 최고액이 걸려있었던 그는 당시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큰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민족의식이 강했던 김원봉 선생은 보통학교 재학 시절,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독립의 꿈을 키워나가던중 3년이 지난 해에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지요.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그의 인생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평화적인 혁명운동을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것이죠!

 

 

 

 

그 날을 계기로 김원봉 선생은 우리에게 가장 역사적인 조국 독립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비밀항일결사 ‘의열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의열단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7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도쿄 왕궁과 각급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의 고위 관직을 암살 시도하는 등 크고 작은 활동들로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는데요.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며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의열단은 무고한 불특정 다수가 아닌 조선민중을 억압하는 인물과 시설에 대해서만 공격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맹렬히 활동했답니다.

 

 

▮ 약산 김원봉이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한 이유

 

 

 

▲ (사진 좌부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약산 김원봉

 

 

김원봉 선생은 의열단 활동을 하던 중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직접 발로 뛰는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요. 의열단의 작전 투입에서 은퇴한 후에는 1935년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인력을 길러내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렇게 성장한 조직원은 독립운동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으로도 잘 알려진 이육사가 있죠~

 

 

이렇게 조국을 위해서 희생한 약산 김원봉 선생,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많이 모르고 있는데요.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한 이유에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북한에서 넘어온 ‘월북자’ 신분으로 국가검열대상자로 분류되어 우리나라에서 그 동안의 희생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원봉 선생은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했는데요. 이 조직을 통해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 광복 후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친일 경찰들에게 쫓기고, 우익 정치인들에게 갖은 수모를 겪으며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죠. 그는 결국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월북하기에 이르는데요. 월북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그 곳에서도 국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숙청을 당하며 그의 파란만장했던 그는 그렇게 눈을 감았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김원봉 선생이 해온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은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데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월북이고, 북한의 고위직을 역임했기 때문에 국가보훈처에서 서훈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요.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살았던 그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오늘만큼은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숨어 있던 우리나라 독립의 주역, 약산 김원봉 선생과 또 다른 숨어있는 순국선열들을 생각하는 의미 있는 날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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