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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수다/워터카페

(7화) History of K-water, 물과 인류 3탄

 

 

History of K-water, 물과 인류 3탄

 

여태까지는 세계적인 흐름에 대해 설명드렸다면 이제는 우리나라와 물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겠죠? 한반도에서 강물을 이용하여 벼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추정됩니다. 경기도 여주군의 흔암리 유적지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지역에서 출토된 탄화 볍씨나 볍씨 자국이 있는 민무늬토기 등으로 미루어볼 때, 청동기시대 이전에 이미 한반도 전역에서 벼를 재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3000년 전에 이미 물을 이용하는 수리기술이 발달되어 있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삼한시대에는 제방을 축조하여 저수지를 만드는 기술과 함께 개울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물길을 돌리는 보를 축조하고 보에서 도수한 물길을 따라 논을 개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벼를 재배하기 위해 대규모 댐인 제언을 축조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고 해요.


 

흔암리, 탄화볍씨, 볍씨, 민무늬토기, 고대한반도, 고대 한국

 

 

▮ 삼국시대 물 관리 역사

  

백제는 지리와 기후 조건이 적합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구수왕 9년(222년)에 제방을 고쳐 짓기를 명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고이왕 9년(242년) 백성들에게 남쪽 땅을 개척하여 논을 만들고 벼를 심으라고 명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벼농사와 수리시설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벽골제·눌제·황등제 등 대규모 제언도 모두 백제 초·중기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벽골제는 동양 최초, 최대의 저수지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되었지요.

 

신라도 일성왕 11년(144년) 각 고을의 제방을 수축하고 널리 농토를 개척할 것을 명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추어 전국적으로 벼농사가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수 있겠죠? 눌지왕 13년(429년)에는 백제의 벽골제보다 규모가 큰 시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에서도 관개를 위한 제방 수축이 국가적인 주요 시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제언은 진흥왕 원년(540년)에 축조된 제천의 의림지로 지금도 원형이 보존되어 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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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물 관리 역사

  

 

고려시대 역시 농업에 힘을 기울이고 이를 장려하여 풍작을 가져오게 하는 일이 가장 요한 국가적 과제였습니다. 고종 17년(1230년)에는 권력을 잡은 무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다는 거~! 인천에서 굴포천을 거쳐 한강까지 운하를 뚫기로 했던 이 계획은 공사 도중 무신들이 권력을 상실하면서 백지화되기도 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종 19년(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정에서는 적을 막기 위해 해안의 요소요소에 흙으로 방축을 쌓았는데, 이때 방축 내부에 형성된 간석지를 농토로 이용한 것이 우리나라 간척사업의 효시라고 합니다. 공민왕 11년(1362년)에는 관개용수를 퍼 올리기 위해 중국에서 수력구동 발전기를 도입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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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물 관리 역사

  

 

조선시대에는 농업을 기본산업으로 삼는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어요. 「태조실록」에 의하면 전국에 각 지방의 농업을 살피는 책임자를 배치하여 늦가을에 정기적으로 제언을 수축하고 물을 저수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 14년(1414년)에는 지방관리들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여 지방 각처를 순회하면서 제언을 수축하고 점검하도록 했다고도 적혀있어요. 세종 때는 각 도의 감사에 대한 공적평가를 주군의 제언 수축 숫자로 결정했으며,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언장부를 작성하도록 하여 해마다 치적 점검에 참고했습니다. 측우기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어요~!

 

성종 17년(1486년)에는 황해도 재령군에서 천방사업을 일으켜 5000~6000섬을 수확할 수 있는 농토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양수기를 사용한 기록도  있구요. 1600년대 초 재령강에 설치된 어지둔보는 규모가 방대하고 공법이 정교하여 조선조 최대 수리시설로 꼽히고 있답니다. 현종 3년(166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모내기 재배법을 보급했으며 효종 9년(165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강원도 횡성에 천방을 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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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물 관리 역사

 

대한제국은 1906년 「수리조합 조례」를, 1908년 「수리조합 설치요강 및 모범규약」을 공포하여 수리 및 농지 조성사업을 시행하는 관리단체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기 시작했어요. 이 율령에 따라 1908년부터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수리조합이 각종 관개 및 배수시설의 신설과 보수를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수리조합이 일본인들에 의해 운용되었기 때문에 두 율령은 이 땅이 일본의 농업 전초기지로 전락하는 빌미를 제공한 결과가 되어버렸어요.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부터 본국이 심한 식량난에 직면하자 초기 식민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토지수탈을 자행하기 시작합니다. 총독부는 대부분이 국유지인 미개간지를 수탈한 뒤‘조선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대대적으로 수리사업을 확대해나갔는데요. 대표적인 수리시설은 운암제와 대아댐이 있었습니다.

 

1927년 12월 완공된 운암제는 1950년대까지 한국에서 가장 큰 다목적댐으로 운암발전소와 칠보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던 곳이었지요. 1940년 4월에 준공된 수풍수력발전소는 일제가 이 땅에 축조한 최대의 구조물입니다.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에 위치한 수풍발전소는 시설용량 70만㎾로 우리나라 최대 수력발전소에요.

 

 

[운암제, 이미지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광복 이후 물 관리 역사

 

광복 이후 1950년대 초까지는 이렇다 할 대규모 물 관리 사업을 추진한 실적이 없었구요.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정부는 국제원조기관의 도움으로 관개용 댐 건설을 추진하여 가창댐과 중리댐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상공부와 한국전력은 수차에 걸쳐 전국 하천에 대한 수력발전지점 조사를 실시했고,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정책이 시행되면서 수자원개발사업 분야에서도 섬진강댐·춘천댐·남강댐을 건설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도 부문에서는 해방과 함께 해외동포가 귀환하고 북한 동포들이 대거 월남하면서인구의 도시 집중현상이 심화되어 급수난이 더욱 가중되기 시작해요. 1947년 현재 남한 인구 1780만 명 가운데 급수인구는 18.5%인 328만 명이었으며, 상수도 시설용량은 하루 24만㎥에 불과했으니까요.

 

한국전쟁으로 40여개 도시의 급수시설이 파괴되자 급수난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어요. 1954년부터 상하수도시설의 복구, 확장 및 신규공사가 시행되었지만 수요 증대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지요. 1960년대에 들어서야 산업 발달과 함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시설용량을 크게 늘리고 급수 보급률을 22%로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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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발전산업의 족적

 

발전사업 부문에서는 해방 전 발전설비의 대부분이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1948년 5월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으로 총 전력수요의 60% 이상을 북한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던 남한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게 되어버렸는데요. 해방 당시 남한의 수력발전 설비는 청평·운암·칠보·보성 등 4개 발전소에 총 발전량은 6만 2240㎾에 불과했어요. 발전용량 10만 8000㎾의 화천수력발전소는 38도선 이북에 있어 북한의 소유였으나 한국전쟁 중 수복되었습니다. 1957년에는 국내 설계·시공기술로는 최초로 2600㎾ 규모의 괴산수력발전소를 완공했어요.

 

1962년 정부는 국토 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산하 국토건설청을 확대·개편하여 건설부를 설치하고 산업 입지, 도시·주택 건설 및 수자원 개발 등을 총괄하도록 했고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진척됨에 따라 정부는 수자원 종합개발 재원을 확보하고 사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수자원개발촉진법」 · 「특정다목적댐법」 · 「한국수자원개발공사법」등 근거법령을 제정하여 1967년 11월 16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를 설립하면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물 관리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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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니 의도치 않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되짚어 볼 수 있었네요! 역시 물은 우리와 함께 흐르며 더불어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1967년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설립된 이후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아야겠죠?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세세한 정보까지! 모두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