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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수다/워터카페

(12화) History of K-water, 국가 성장의 디딤돌 산업기지개발공사_2탄

 

 

제 2절, 신흥공업국으로 약진하기 위한 국가산업단지 건설 

 

저번시간, 정부의 경제육성과 중화확공업 개발 정책에 따라 산업기지개발공사로 이름을 바꾸고 그 역할에 충실했던 K-water의 모습 함께 보셨는데요. 오늘은 그 연장선으로, 국가 곳곳에 국가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종합적인 공업단지로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졌던 K-water의 발자국에 대해 한번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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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권의 중핵, 여천석유화학공업단지

 

여천에 국가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한 것은 우리공사가 설립되기 이전인 1963년 3월이었습니다. 여천은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경제적·문화적 혜택이 낮은 곳. 정부는 여천을 영산강·광주권 개발사업과 함께 전남권의 3대 중핵지로 개발하기 위해 석유화학공업을 수용할 대규모 임해공단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광양만에 위치한 여천공단은 울산석유화학 콤비나트에 이어 두 번째 석유화학 전문공단으로 계획되었지요.

 

공단지역은 평균표고 100m 이하의 야산에 둘러싸여 약 990만㎡의 광활한 간척지를 임해공업용지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겸비하고 있었어요. 동남부는 협소한 수역 이지만 수심이 20m여서 방파제가 필요 없는 천연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죠. 1966년 건설부는 여천 일원을 공업지역으로 지정했으며, 1967년 2월 호남정유공장이 착공되면서 건설부에 의해 단지조성에 필요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공사는 1973년 1차로 현지답사를 실시하여 기본계획을 수립한 뒤 그해 8월 공단 건설에 착수했답니다. 1974년에는 광양만 일대가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18.1㎢ 규모의 본격적인 석유화학 콤비나트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77년에는 남해화학(제7비료) 여천공장이 준공되고 배후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쌍봉지구 개발사업이 착수되는 한편, 산업기지개발구역 면적이 44.1㎢로 확장·고시됨으로써 대단위 산업기지기반이 마련되었어요.

 

공단 내에 시설용량 60만㎾의 호남화력과 50만㎾의 여수화력이 있어 동력 공급조건도 양호했습니다. 연평균 강수량은 전국 평균치를 웃도는 1347mm이며, 수어천댐 건설로 하루 25만㎥의 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전라선 철도가 건설되어 있고 여수-부산, 여수-목포를 잇는 해상교통과 서울-여수-제주를 연결하는 항공편이 개설되어 있어 교통 및 물류여건도 양호했어요.

 

1980년에는 제2석유화학단지 내에 관련 공장들이 준공되어 각종 석유화학 기초소재를 생산·공급함으로써 종합화학단지 면모를 갖추고 우리나라 국제수지 개선에 크게 기하기 시작했는데요. 1980년대 후반 광양에 종합제철단지가 건설됨에 따라 광양·여수를 포함한 광양만지역은 제철·석유화학 등 기초소재를 중심으로 남해안 굴지의 종합적인 공업지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천공업단지는 석유화학계열의 다양한 업종이 한자리에 집중됨으로써 기술·정보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물류 시간 및 비용이 절감되는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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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천공업기지 준공식]

 

 

▮ 국내 최대의 창원종합기계공업단지

 

1970년 우리나라 기계공업은 서울과 부산 양대 도시가 58.7%를 점유하고 있었는데요. 정부는 균형적인 지역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지방에서 기계공업 거점을 물색하던 중 1970년대 초 창원지역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임해·용수·교통·항만·운송·기후 등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며 주변은 분지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장점. 하천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여 범람하는 사례가 많았으며, 모든 하천은 봉암하구에서 집수되어 마산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분지 안쪽은 낮은 구릉과 평탄한 농경지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연간 강수량은 1530.5mm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죠.

 

창원공업단지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계획 수립을 거쳐 1973년 9월 대통령 지시에 의해 우리공사에 건설사업이 맡겨졌답니다. 1974년에는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총 면적 20.20㎢ 규모의 기계공단 조성사업이 시작되었어요. 창원공단 건설계획의 이면에는 방위산업 육성 의지도 깃들어 있었는데요. 방위산업 육성계획은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고도의 보안이 필요한데, 창원은 포항제철 및 해군기지가 있는 진해와 인접하여 보안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창원공단은 배후 산업도시를 포함하여 총 5290만㎡ 규모로 조성되었습니다. 완공된 창원공단은 제1단지·제2단지·완암단지·안진단지·하구단지·적현 단지·삼동단지·귀곡단지·성주단지·차룡단지 등 10개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폭 50m, 길이 12.8㎞의 창원대로를 경계로 서남쪽의 공업지역과 동북쪽의 주거지역으로 구분됩니다. 그 중 우리공사가 조성한 1983만 5000㎡의 공업지역에는 313개 공장이 가동되고 있어요. 이들 업체에서는 원자력 발전설비, 항공기 부품, 방위산업 제품, 공작기계, 건설 중 장비, 기관차 및 객차, 자동차 및 부품, 전기 기계 등 각종 첨단 중화학공업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계공업 부문의 생산 규모가 제조업의 26.3%를 차지하면서 우리나라 공업구조가 선진국형으로 탈바꿈하는 데도 창원공단의 역할이 컸지요.

 

창원공업단지는 공단과 함께 주거·교육·연구시설 등을 종합적으로 갖춘 신공업도시입니다. 기반시설로는 하루 20만㎥ 규모의 공업용수, 48만㎾의 전력 시설용량, 2만 1000회선의 통신시설, 하루 25만㎥ 처리규모의 폐수종말처리장 등을 갖추고 있어요. 공단 내에는 우리나라 기계공업을 대표하는 많은 대기업들이 입주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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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공업단지 전경]

 

 

▮ 비철금속의 요람, 온산공업단지

 

중화학공업 가운데 비철금속 제련·정유·화학·펄프·제지산업 등은 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으로 어느 나라든 입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는데요. 우리나라도 1966년 7월 대통령령으로 울산에 특정 공업지역을 지정·고시하여 대단위 중화학공업 공단 건설에 착수하면서 오염유발산업을 유치할 별도 공단의 입지 선정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어요. 정부는 전국 여러 지역을 탐색한 결과 1973년 3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온산 지역을 비철금속공단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습니다. 온산공단은 석유 관련 업체들이 입주한 울산공단과 인접하여 집적효과가 높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이 바다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공해의 격리가 쉽고, 항만시설이 가능하여 공해산업의 적지로 채택된 것입니다.

 

건설부는 1974년 4월 온산 일대 16.53㎢를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고시했어요. 우리공사는 1974년 12월 온산건설사무소를 설치하고 1976년부터 아연단지를 시작으로 온산공단 건설을 수행했답니다. 1977년에는 신동단지·펄프단지·한국제지단지 개발, 1980년에는 비철연관 4차단지 개발에 착수하여 이듬해 준공했습니다.

 

온산항은 토사의 퇴적으로 수심이 비교적 얕으며 항내 해면이 4.5㎢로 매우 좁았는데요. 이런 여건으로 남측 해수면 일부를 매립하여 부두용지로 전환한 뒤 대형 선박 1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전용 항만시설을 건설했습니다. 공단의 물량을 수송하기 위한 선박 접안시설은 업종별 전용부두로 설치했구요. 교통시설은 동해남부선 남창역에서 공단까지 12.7㎞의 단지 전용철도를, 울산공단과는 4.3㎞의 산업도로를 개설했답니다. 기반시설로는 하루 43만 2000㎥의 공업용수, 시설용량 154㎾의 전력, 2만 2400회선의 통신시설 등을 갖추었습니다.

 

온산공단의 총 면적은 17.3㎢였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공업용지 공급이 한계에 도달하자 1991년 12월에는 ‘온산국가공업단지 개발 기본계획’을 변경·고시하여 336만 2000㎡의 공단을 추가 조성했어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온산공단은 우리나라 비철금속공업을 선도하는 공단으로 각광받고 있죠? 비철금속공업은 방위산업의 핵심이란 점에서 더욱 중요시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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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동해펄프단지 착공]

 

 

▮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안산신도시

 

1945년 해방 당시 90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가 1960년대 초 250만 명으로 급증하자 정부는 1964년‘대도시 인구 집중 방지책’을 마련했야 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산업도 서울로 집중되어 비도시형 산업의 30%가 수도권에, 그 가운데 60%가 서울에 집중되는 기형적 현상이 뒤따랐어요. 정부는 개발제한구역 설정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놨지만 서울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970년에는 550만 명을 넘어섰고, 인구와 산업체 증가로 각종 공해문제를 일으켰지요.

 

이에 정부는 수도권에 자급도시를 건설하여 서울의 중소기업과 인구를 합리적으로 분산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요. 1976년 7월 건설부는 서울에서 가깝고 도시 기반 시설 확충이 용이하며 공해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안산을 신도시 예정지로 선정했습니다. 안산신도시 개발예정지역은 서울로부터 약 35km 떨어져 있으며 행정구역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수암면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지역으로 2군·3면·19리를 포함하고 있었어요. 개발예정지 주위는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총면적은 74.85㎢였구요.

 

1976년 10월 정부는 이 지역을 신도시개발지구로 고시한 데 이어 12월 우리공사를 개발 주체로 지정했고, 우리공사는 신도시 추진계획을 수립하여 현장실사에 들어갔습니다. 안산신도시는 경공업을 주축으로 한 신산업도시, 2차산업을 주축으로 서비스업과 완벽한 도시시설을 갖춘 자기완결형 자족도시, 기반시설이 완비된 전원주택도시로 개발할 계획이었어요. 1977년 1월, 우리공사는 도시개발부를 신설하고 직원들을 세계 주요 도시에 파견하여 신도시 건설 경험과 기술을 습득하도록 한 뒤 3월에는 기공식을 개최하고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답니다. 이 지역은 1986년 안산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반월신도시로 통용되었습니다.

 

우리공사는 계획대로 공사를 진행하여 1992년 12월 1단계 공사를 완료했어요. 조성면적은 공업용지 1018만 7000㎡, 주거용지 1217만 2000㎡, 상업용지 161만 3000㎡, 녹지 및 기타 용지 509만 3000㎡ 등 총 2906만 5000㎡였습니다. 안산신도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설된 계획도시로 낙후된 서해안지역 개발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답니다. 수도권의 여느 위성도시처럼 서울로 출퇴근하는 이른바 ‘Bed Town’이 아니라 대학을 유치하고 공단을 조성하여 생산과 소비가 한자리에서 이뤄지는 자급형 도시로 만든 것입니다. 공단은 주거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섬유·화학·기계 등 업종별로 조성했으며, 빗물과 오폐수를 분리하여 처리장으로 보내도록 우·오수 분리관거 또한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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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신공업 도시 건설 기공식]

 

 

그 거대한 공업단지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니, 놀랍죠? 또한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에 큰 도움을 주고,

특색을 가진 차별화된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공업단지! 그 중심에 K-water가 있었음을 잊지 마세요^^